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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집 (1) - 2
at 2006-04-09 16:30:24 0 comment
아, 백작이 자신을 사병으로 채용하기로 마음먹었던 그 토너먼트 말이로군.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유더는 불현듯 생각이 났다.
" 그런데 르 로엔그린 백작이란 자는 대체 어떤...? "
말을 채 마치기도 전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노집사 에이머스가 헛기침을 하며 들어와 섰다. 그 모습을 보자, 실없이 농담을 주고받던 레스테어와 워반, 심지어는 에포니나마저도 살짝 진지한 표정이 되어 자세를 바로잡았다. 카시드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왔군. "
그 한마디에 유더도 곧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는 그들을 사병으로 고용하고, 가신으로서 르 로엔그린 가에 들여준 루로열의 주인이 온 것이다. 유더는 잊었던 긴장감이 다시 살짝 전신에 감도는 것을 느끼며 턱을 당겼다. 카스펠로윈 백작 르 로엔그린. 과연 어떤 인물인가.
개척왕 시대 이후로 그라나도 에스파다에는 이미 수많은 유서있는 가문 출신들이 건너와서 기반을 다투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르 로엔그린 백작은 좀더 수수께끼에 싸인 존재로 항상 유더 같은 무계약 용병들 사이에서는 꽤나 관심대상이었다. 일단 그 가문의 배경이 그러하고, 은둔자처럼 좀체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신대륙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뒷소문이 그러했다. 굉장한 재력가이기는 하나 아직 미혼이고 게다가 본토에서는 이미 친지들에게 절연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아무 의지할 곳도 기반도 없다고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광대한 땅과 자원에 관심이 많다고. 척식회사의 대주주이지만, 친척이나 자식이 없기 때문에 개발경쟁에서의 핸디캡을 줄이기 위해 종신고용이나 가신의 형태로 사병을 찾고 있다는 소문은 더더욱 매력적이었다.
그랬는데 자신이 지금 이곳에 서 있다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행운임이 분명하다. 유더는 자신을 다잡듯 부릅뜬 눈에 힘을 줬다. 누구든 상관없다. 지금 저 문 뒤로 나타날 인물이 바로 유더 자신이 충성을 바치고 검과 목숨을 맡길 주인인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네명과 마찬가지로.... 집사가 유난히 더 근엄한 목소리로 선포했다.
" 카스펠로윈 백작, 아마레나 카탈리 어스윈 르 로엔그린 님께서 드십니다. "
가볍게 목례를 취할 준비를 하고 있던 유더는 뒷목덜미 근처가 꼿꼿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 잘못 들었나? 그건 분명히....
여성의 이름이 아니냐고 스스로에게 반문할 틈도 없었다. 자랑스럽게 문 뒷쪽을 향해 허리를 굽힌 에이머스를 지나쳐 사락사락 다가오는 것은 분명 긴 드레스 자락 끌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해진 유더가 표정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여백작> 르 로엔그린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맑고 상냥하지만 부러질 듯 강한 심지가 그대로 드러난 목소리가 유더의 양 어깨에 날아와 꽂혔다.
" 르 로엔그린 가에 잘 왔소, 유더 캐넌. 내가 그대의 고용주, 아마레나 카탈리라 하오. "
" 아, 저....... "
당혹한 나머지 수십 번도 더 연습한 인삿말이 목구멍 속에 얼어붙었다. 공손한 척 고개를 숙인 에포니나에게서 피식 하고 바람빠지는 웃음소리를 듣자 더더욱 수습할 수가 없었다. 자상하게도 <애송이 녀석>하고 읊조리는 레스테어의 목소리나 배를 잡는 워반의 모습조차도 선했다. 다급하게 고개를 더 깊숙이 조아리며, 유더는 간신히 생각해 왔던 점잖은 인삿말의 한 구절을 애타는 심정으로 낚아챌 수 있었다.
" 부,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부족한 소신, 앞으로 전력을 다해.... "
" 딱딱한 인사는 생략해도 좋소. 고개를 들어요. "
부드러운 말에 이끌려 시선을 감히 쳐들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가신들을 만난다는 게 일상적인 업무인 탓인지, 여백작은 잠옷이나 다름없는 가벼운 실내용 드레스에 가운 하나를 걸친 차림으로 그녀의 사병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이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삼십대 초중반. 그다지 키가 크지 않은 여성이었으나 마냥 가냘프게만 보이지는 않을 정도로 치켜든 목줄기라던가 몸가짐에서 위세가 넘쳐 흘렀다. 윤기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올려 보석세공이 된 머리핀으로 정리했고, 피부는 매끄러운 다갈색. 그런 그녀에게서는 한창 때의 꽃다운 처녀애들로서는 넘볼 수 없는 우아한 매력의 향기가 풍겨나와 유더는 잠시 홀린 듯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시선을 알아차린 듯 그녀가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 왜 그러오? 설마하니 여주인을 모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얼굴이로군. "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
등뒤에서 <아이쿠, 이런 고지식한 친구!>라며 내쉬는 레스테어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험한 뒷골목 세계에서 살아온 유더로서는 나름대로 절박하고도 신기하기 짝이 없는 궁금증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백작 아마레나 카탈리는 비웃지 않고 가느다란 손을 목 뒤로 올려 틀어올린 머리칼을 매만졌다.
" 하긴, 그도 그렇겠군. 이 거친 신대륙에 식솔 하나 없이, 친척이나 패트론도 없는 여자 혼자 몸으로 들어와 척식회사에 적을 둔다는 건 확실히 정상이 아니야. "
그러나 그녀는 곰곰 생각하더니 뜻밖에도 스스럼없이 싱긋 미소 짓는게 아닌가.
"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대들 도움이 필요한 거요. 그대들은 모두 하나하나 내가 직접 내 발로 다니며 내 눈으로 보고 선택한 인재들. 모두가 없어서는 안 될 내 오른팔이자 충실한 가신들이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
" 과분한 말씀을. "
레스테어를 비롯한 모두가 정중하게 여주인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을 당당하게 바라보던 여백작의 시선이 언뜻 와 닿자 유더 또한 분위기에 휩쓸려 마찬가지로 허리 굽혀 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만족한 듯, 여주인은 한숨과도 같은 엷은 숨을 내쉬더니 친히 유더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스치며 친밀감과 신뢰를 표했다.
" 앞으로의 활약, 기대하겠소. 브리스티아의 캐넌 출신 파이터, 유더. "
" 내 이 두 자루 검은 주인의 뜻대로. "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리긴 했으나, 그 순간만은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더를 개인방으로 안내해 주라는 명을 따른 충실한 집사 에이머스의 뒤를 따르면서도 유더는 별로 자신의 결정에 후회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여자 혼자 지키는 가문이라는 건 이전에도 들어본 적 없고 상상해본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무슨 큰 흠이 되겠는가. 그는 구세대적 인습과 조상의 망령에 사로잡힌 상류계급이 아니라,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죄인의 후손이라는 오명과 가난 뿐, 오로지 자신의 몸과 무기만이 힘이 되는 밑바닥 출신이었다. 합리적인 사고로 말하자면 도리어 유더와 같은 부류들이 더욱 이 그라나도 에스파다라는 신세계에 어울리는 주민일 것이다.
" 여깁니다. 약간 북향인 게 흠이긴 하지만 정원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전망이 제법입죠. 유더 님을 위해 백작님께서 손수 고르신 방이랍니다. "
과연 좋은 방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두 발 쭉 펴고 잘 만한 이부자리도 없던 처지에 어떤 방이든 과분하지 않겠냐마는, 한눈에 보기에도 통풍과 채광을 고려한 게 신경 쓴 티가 역력했다.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침대와 창가에 리넨 천을 친 게 전부이긴 하지만 유더는 일단 백작의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그럼 편안히 쉬시길>이라고 다소 상투적인 인사를 남기며 에이머스가 물러간 직후, 유더는 사지를 뻗고 침대에 몸을 던지며 썩은 나무판자가 삐걱거린다거나 쑤셔넣은 짚이 고약한 곰팡내를 풍기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마음 속으로 환호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 그렇지. >
잠시 청결한 시트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유더는 생각났다는 듯 몸을 퉁겨 일어났다. 얼마 안 되는 초라한 짐은 벌써 에이머스가 하인을 시켜 문가에 부려둔 지 오래였다. 한쪽 무릎을 마룻바닥에 대고 쪼그려 앉아 가방 안으로 손을 밀어넣자 금세 차갑고 작은 상자가 만져졌다. 유더는 안심했다는 듯 풀어진 표정이 되어 가슴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에 입맞추었다. 싸늘한 금속의 맛이 입술 위에 감돌자 재빨리 십자가를 뗀 후 조심스럽게 상자를 끄집어냈다.
" 형, 갑갑했지? "
상자는 유골함이었다. 사빈 캐넌. 유더는 그립고도 막막한 얼굴로 형의 이름이 새겨진 뚜껑 위를 손으로 쓸어보고는 방 안에서 제일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찾아 선반 위에 마치 성물이라도 다루는 듯한, 아니, 그 이상의 태도로 진중하게 상자를 자리잡았다. 그런 그의 표정은 마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양 천진하고도 한없이 기쁨에 차 있었다.
" 잠시 기다려, 형. 곧 창문을 열 테니까. "
문고리는 과연 50 여년 전에나 유행했을 법한 고풍스럽고도 섬세한 양식으로 조각된 잠금쇠 형이었다. 예전에 단 한번 봤던 기억을 더듬어 복잡한 장치를 한 손으로 누르고 겨우 빗장을 풀자, 갑자기 덧창이 밖으로 확 밀려 열리며 동시에 바깥의 온갖 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나뭇가지 소리와 사람들이 내는 소음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급작스러운 돌풍에 잠시 눈을 찌푸리던 유더는 정원을 거니는 낯익은 실루엣에 의아하게 몸을 내밀었다.
" 응? 백작님 아냐? "
어느새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여주인이 양산을 곱게 받쳐든 채, 회양목 울타리와 잘 손질된 수선화 화단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그러나 유더가 주목한 것은 그녀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시드렐. 무슨 일인지 그가 어깨까지 물결치는 금발을 날리며 성큼성큼 큰 걸음을 걸어, 홀로 산책을 하고 있는 주인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단호하게 굳은 얼굴은 3층의 유더에게도 보일 정도로 확실했다. 과연. 카시드렐은 여백작 앞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서더니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붙이고 있었다. 공적인 용무치고는 참 묘한 곳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며 유더가 무심결에 창가를 떠나려 할 때였다.
" 그러니... 당신은...! 내가 생각대로...! 그건 무리...! "
낮은 목소리로 거의 들리지도 않게, 긴요한 안이라도 전달하는 듯이 조곤조곤 말하던 카시드렐의 언성이 높아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반사적으로 의자에 걸어뒀던 검을 후닥닥 집어들며 다시 창가로 돌아온 유더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지금 정원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카시드렐이, 떠받치듯 여주인을 와락 끌어안은 채 고개숙여 그녀에게 입술을 포개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주변의 바람도, 시간의 흐름도 멎은 것만 같았다. 흐드러지게 핀 황금 같은 수선화만이 유더의 두 눈을 찔렀다. 카시드렐의 등을 움켜쥐고 있던 여주인의 손이 잠시 바르르 떨더니 천천히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오른손이 허공 높이 치켜올려지는 것을, 유더는 똑똑히 목격했다.
날카로운 소리.
그리고 총사의 뺨을 후려갈긴 여주인은 조금도 흔들림없는 목소리로 위세등등하게 소리쳤다.
" 무례한! "
조금의 여유도 두지 않고 휙 몸을 돌려 떠나가는 그녀를 향해, 카시드렐이 그의 차가운 첫인상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간절하게, 마치 몸이 쥐어뜯기는 것처럼 외쳤다.
" 카탈리! "
그 애처로운 부름에 백작의 등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을 만큼 오랜 순간은 아니었다. 자줏빛 옷자락을 나부끼며 그녀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멀어져 버렸고, 혼자 남겨진 총사는 입술을 깨물고 서 있다가는 무너지는 표정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한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의 넓고 굳건한 어깨가 잠시 떨리다가 곧 조용해졌다.
유더는 내밀었던 몸을 거둬들이며 소리나지 않게 창문을 달칵 닫았다. 아직 어리다고는 하나 방금 목격한 광경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영 모를 만큼 쑥맥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유더는 방관자일 뿐인 자신이 가랑비라도 맞은 듯이 한기를 느끼는 것을 깨달았다.
< 어째서? >
괴로움을 눌러 삼키듯 고개를 숙인 카시드렐의 모습이 안쪽에 깊이 새겨져 눈을 감아도 떠도 마치 너무 강렬한 여름햇살의 흔적인 양 지워지지를 않았다. 한순간에 망가져버린 기분을 수습하지 못한 채 유더는 이 감정도 혼란의 정체도 알지 못하고는 다시 침대 위로 내던지듯 몸을 파묻는 수밖에 없었다.
바람의 집이 바람을 부르며 윙윙 몸을 떠는 소리가 벽을 사이에 두고 그 무엇보다도 깊고 외롭게 울려오고 있었다. 그것이 유더가 이 저택에 도착한 첫날, 잊지 못할 그곳의 인상이었다.
할일: 꼴리는 대로 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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