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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어떤 바나나
at 2009-07-07 03:19:18 6 comment
너무 익어 뭉근해진 바나나를 입 속에 넣었다.
형체가 사라지는 듯 입 안에서 허물어지는 바나나를 삼키면서, 그녀를 생각했다.
하아아아아, 하고 내쉰 한숨 끝부분에서 몸이 부들 부들 떨리는 것이 등을 돌리고 있어도 목소리로 느껴졌었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 너머로 그녀는 울고 있었다.
어깨와 손을 부들 부들 떨면서 굵은 눈물 방울들을 투둑 투둑 흘리고 있었다.
차라리 엉엉 울어버리고나 말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히 조용하게 그녀는 울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숨기고 싶은 듯 고개를 푸욱 수그리고 숨을 죽여가면서 히끅 히끅 울고 있는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속이 상했다.
그녀를 울린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이름은 익히 듣고 있었다.
늘 작품 흥행에 실패했던 감독이었지만, 이번 영화로 재기에 성공했다고 들었다.
영화만 개봉하면, 그녀와의 사이가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입맛이 쓰디 쓰게 느껴졌다.
내 자취방으로 찾아온 그녀는 거의 인사불성 상태였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다리는 휘청였고, 울지않았는데도 두 눈가가 붉었고, 무엇보다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 어떻게 해.. 어쩌지? 그 사람,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대.."
누구에게 건네는 말이기보다는 자조섞인 한탄 같은 몇 마디를 내뱉고 그녀는 울기 시작했었다.
한참을 조용한 방 안에서 그녀와 나, 둘이서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울음을 흘려보냈다.
그랬다, 우리에게는 슬퍼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얼마 전 연인을 미국으로 떠나보낸 나나,
로케에서 돌아왔지만 연인의 마음을 잃어버린 그녀나,
그저 묵묵히 말 없이 슬퍼할 시간을 필요로 했다.
문득 허기가 느껴져서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냉장고 안을 열어보니 생수와 바나나가 있었다.
어느샌가 눈물을 그치고 기진맥진한듯 쇼파에 몸을 추욱 늘어뜨린 그녀의 앞에 물과 바나나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물기 어린 눈동자가 내 손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다가 또 한번 주륵, 얇은 눈물 줄기를 뽑아냈다.
"먹어, 기운내야지."
"입맛이 없어."
"며칠 째야?"
"뭐가?"
"안 먹은 거."
"....... 어떻게 알았니?"
"손목이며 가슴께 빼짝 꼴은 거 안 보여? 너 매번 그랬잖아. 무슨 일 있을 때마다 물도 제대로 안 마시고 다니는 거.."
또 한 바탕 잔소릴 늘어놓으려는데, 그녀가 여린 얼굴로 피식 웃었다.
바나나를 까서 그녀의 앞에 들이 밀었다.
"자,"
"입맛 없대두.."
기운 없는 목소리에, 왠지 나까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큰 소리로 더 권했다.
"먹기 힘들면 입 벌려, 내가 먹여줄께. 너 이러다 또 저번처럼 쓰러지고 병원에 입원하는 꼴, 나는 더 못 봐"
파리해진 안색의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퍼석해진 머리칼이 흔들렸다. 내민 바나나를 입으로 베어무는 모습이 사슴 같다고 생각했었다.
덫에 걸린 어린 사슴. 그녀와 나는, 세상이 쳐 놓은 사랑이라는 우습기 짝이 없는 덫에 걸려 바둥거리는 어린 짐승들 같았다.
달콤한 바나나 향기가 방 안을 채웠고, 마른 듯 하던 밤 공기가 젖어드는 기분이였다.
그녀는 몇 시간 정도 내 쇼파에서 잠을 자다가 파랗게 새벽이 되어서야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그 길에 사고를 당해서 두 번 다시 나는 그녀에게 바나나를 먹여줄 수도,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함께 울수도 없게 되었다.
그녀의 장례식에서 그 영화감독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그녀가 좋아하던 하얀 백합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화환이- 발신인을 밝히지 않은 채 몇 십개나 왔었다.
지랄한다, 속으로 욕을 해댔었다.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은 그렇게 그녀의 아픈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게 되었고,
나는 어째서 그녀를 더 잡아두지 못했나, 또 그녀의 슬픔을 그 정도 밖에 달래주지 못했나 하고
두고 두고 후회하고 아파했었다.
촬영이 끝나고서, 소품인 바나나를 들고 차에 들어 왔는데 차 뒤쪽 시트에서 익숙한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잃어버렸던 목걸이. 그녀가 죽은지도 몇 달이 지났는데.. 어째서 이제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조수석에 놔 두었던 바나나를 하나 집어서 껍질을 까는데, 눈물이 났다.
사랑을 두고, 나를 두고 가 버린 그녀의 하얀 목덜미며
그날 밤의 부들 부들 떨리던 그녀의 어깨와 가느다란 손목, 헝클어진 얇은 머리카락들.
그래도, 그녀는 바나나를 먹으면서 조금, 웃었었다.
그녀의 명도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친구로의 역할도
그날 밤, 거기까지였을 뿐이리라.
너무 익어 슈가스팟이 촘촘히 박힌 노란 바나나 껍질 너머로 그녀의 마지막 미소가, 달콤한 향기와 함께 피어오르다 지워졌다.
알수없는 죄책감과 무기력함에
미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은지도 몇 달이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대, 라며 세상이 끝난 듯 체념한 목소리의 그녀가 떠올라서
나는 더이상 누군가를 사랑하기가 겁이 난다.
달콤하게 혀 위에서 뭉게진 바나나 과육은 농익은 연인들의 키스처럼 포개어졌다 입 안에서 녹아 사라진다.
바나나 안의 당분은 내 피를 돌고 도는 에너지원이 되었다가 사라질 것이다.
아마, 이렇게 피하고 있어도-
언젠가는 그 사람의 연락을 받거나 혹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살아남은 자는 그 우스운 일들을 또 반복해나가며 살아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내 손에 쥐여져 있던 바나나를 베어물던 그녀의 입술과 뺨 옆에 드리워지던 머리카락들을 떠올리면서
바나나를 먹다가 눈물을 흘릴 뿐이다.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오다 끊어졌다.
바나나 껍질 위로 떨어지는 것이, 내 눈물이 아닌 그 날 밤 그녀가 흘리던 눈물처럼 느껴졌다.
벌써 몇 년간 울지 못하던 내 대신, 하늘의 그녀가 대신 내 몸을 빌려 울어주는 것 같은 묘한 기분.
차 창문을 내렸더니 밤하늘에는 얇은 초생달이 보인다.
계절이 바뀌어서 벌써 여름.
바나나 향기가 끄집어낸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 나를 울리고 사라졌다.
천국에서 그녀는, 밝게 웃으면서 지내고 있을까?
그날 밤에 아주 느린 속도로 베어물었던, 그렇게 먹었던 바나나는,
죽은 그녀의 위장 속에서 썩어들어가 그녀의 시체와 함께 달콤한 바나나향을 풍기고 있을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밤하늘의 달을 보며 흰 바나나 과육에 찍혀있던 그녀의 이빨 자국을 애써 기억해냈다.
하늘에서 그녀는, 백합꽃 밭에서 바나나를 먹고 있을 것 같다고 우스운 상상을 했다.
피식, 웃음이 나오고 그제야 눈물이 멎었다.
살아남은 자가 먹는 바나나의 맛은 기묘하구나.
언젠가 그날 밤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된다면,
나는 그녀에게 먹여주었던 바나나를, 나 역시 함께 베어 물고-
피곤함을 핑계 삼지 않고 함께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아 줄텐데.
입 안 가득 퍼지는 바나나의 맛 안에, 그녀의 눈물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나를 향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내 안에서 반복되는 그녀의 이야기가, 서글프게 울리다 사라진다.
이글루스 가든 - 혼자놀기
이글루스 가든 - 창작놀이하자.



2009-07-07 09:37 #
바나나..
2009-07-09 10:42 #
2009-07-07 10:05 #
간만에 마음울리는 단편 소설하나 읽었어요
근데...오랜만에 들어온 블로그가.. 스킨이 저랑 똑같아서.. 바꿔야 하나.. 고민중입니다...;;;; 어쩔까요...
2009-07-09 10:43 #
그리고 스킨은 비슷한 걸 쓰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저는 스킨 추가되는대로 좀 이래 저래 바꿔보려 해요^-^
2009-07-07 19:00 #
아이님은 소설에도 재주가 있으시네요. 저는 죽었다 깨나도 이런 글은 못 쓰는데....
한번 장편을 써 보시는 건 어떠실지요? ^.^
2009-07-09 10:43 #
어릴 때부터 쓰고싶던 글은 있었지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