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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만국박람회]의 오류들
at 2009-01-13 22:32:29 0 comment
이시코 쥰조(石子順造)와 쓰게 요시하루(つげ義春)
사와라기 노이(椹木野衣)著 『전쟁과 만박(戦争と万博)』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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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万力のある家』연재 칼럼
'만화/영화 탐밤 (2007.7.25)'
타카노 슌조(高野慎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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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つげ義春「(돌을 팔다)石を売る」사와라기 노이(椹木野衣)의 미술 평론집『전쟁과 만박(戦争と万博)』안에서, 故 이시코 쥰조(石子順造)와 쓰게 요시하루(つげ義春)와의 관계가 서술되어 있지만, 몇개의 실수가 보여서 정정해 두고 싶다.
사와라기는 , 현대미술가 이우환(李禹煥)과의 담화에서 "이시코씨로부터 언제나 전화가 있었고, 언젠가, '뭐하고 있어요. 잠깐 오세요' 라고 해서, 가보면 언제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만화가와 같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틀어 박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쓰게 요시하루씨 였습니다"『(이시코 쥰조와 그 동료들)石子順造とその仲間たち』수록)라는 말을 근거로해서,「(이시코 영향아래에 있던 쓰게 요시하루)石子の影響下にあったつげ義春」 象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또 마치 쓰게의 만화 작품「(무능한 사람)無能の人」이 마치 이시코의 수석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것처럼 쓴 것을 읽을 수 있다.
필자는 60년대 중반부터 이시코와 쓰게 두명 모두와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당시의 모습은 기억에 새롭다. 그즈음을 가능한한 그대로 떠올려 보고 싶다.「(나사식)ねじ式」을 발표한 다음 해인 69년 정월에, 쓰게는 이시코의 시즈오카(静岡) 자택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 때가 바로 이(李禹煥)와의 첫 대면이었을 것이다. 이 때의 모습은, 이시코가 『(예술생활)芸術生活』에 썼던 에세이에 기록되어 있다. 사와라기는 "쓰게가 사와라기가 살던 신주쿠 '十二社の星' 아파트에 이사 온 것은 69년 3월의 일이다' 라고 적었지만, 이것만으로는 마치 쓰게가 이시코와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것처럼 읽힐 수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고, 이시코가 다른 맨션에 이사한 결과, 지금까지의 이시코의 작업실에 쓰게가 쵸후(調布)로부터 들어왔기 때문인 것이다. 이때의 사정은 필자도『(쓰게요시하루 1968)つげ義春一九六八』(筑摩文庫)에 밝혀 놓았다.
확실히, 이사간 이시코의 맨션은 별아파트로부터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쓰게는 이시코의 방을 이따금씩 방문했던 것 같다. 아니, 쓰게의 방에 이시코가 자주 찾아왔었다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의 왕래를 이시코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녔다. 아마, 이(李禹煥)도 그걸 듣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즈오카의 정월 이후, 쓰게는 이(李禹煥)를 만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문제는 이(李禹煥)의 어긋난 기억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와라기의 논술의 내용에 있다.
책의 내용 중에 「(거기에는 언제나 돌이 있었다)そこにはいつも石があった」라고 제목을 붙인 6장은, 대부분 이시코 쥰조의 평론이나 위상에 포커스가 맞혀져 있어서, 현대미술을 통한 이시코의 재평가의 취지인지가 분명치 않다. 즉, 이시코의 작업에 대한 강한 관심이다. 하지만, 그때의 기세가 지나쳐서 축의 중심이 이시코에게 기울게 된다. 타마가와(多摩川)에서 돌을 파는 사람이 주인공인「(돌을 팔다)石を売る」시리즈까지, '이시코의 영향 아래' 라는 인상조차 주고 있다. 하지만 쓰게가 그 연작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85년이다. 이시코가 타계하고나서 벌써 8년이 지난 후였다. 쓰게가 돌매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거주지에서 가까웠던 타마가와(多摩川)에서 돌을 줍는 노인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스스로가 적고 있다. 이시코가 돌에 관련된 사상(事象)에 강한 관심을 나타낸 것은 71년경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것들은 주변의 현대미술가들과의 '공동연구'에 의한 것이었다. 쓰게는 69년 3월에는 쵸후로 돌아왔기 때문에, 十二社로의 이시코와의 왕래는 68년 이후 불과 1년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시코가 쓰게에게 돌에 관련된 이야기를 했던 적은 없다고 본다. 필자는, 쓰게가 떠난 뒤에 이시코로부터 몇번이나 돌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 필자는, 60년대부터 도조신(道祖神)1)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시코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 하지만, 이시코는, 야마나시(山梨)의 마루이시신(丸石神)을 고집하면서, 나가노(長野)나 군마(群馬)의 도조신이나 석상물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무래도 민속학적인 흥미보다는 말하자면 조형적인 흥미가 강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사와라기는, "이(李禹煥)와 교류가 있던 이시코는, 그것을 일본식 풍속에 기인한 서브컬처적인 소실극과 접목해서 생각했던 마디가 보인다" 라고 하면서 바야흐로 이시코가 현대 미술의 관심을 급속히 잃고, 만화의 세계로 접근해 나가는 시기에 다다랐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이시코는 '미술'을 버려서까지 '만화'의 세계에 매료되어 갔는가" 라고 적고 있다. 이 문맥에서는 '미술'이 마치 '만화'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라고 읽힐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시코의「에마연구(絵馬研究)」2)에 대해서도, 사와라기가 '무명의 민중들이 자신들의 소망 실현을 위해서 봉납했던, '철없는 탄원서' 라고 간단히 단편적으로 정리해버린다. 에마(絵馬)는 '소망실현'을 위해서도 아니고, '철없는 탄원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민중의 '비원(悲願)'이며, '기원(祈願])' 인 것이다. 그런 왜곡된 민중의 모습에 대해서는 이시코도 가만히 듣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50년대의 맑스 레닌주의자인 이시코가, 60년대 후반의 '반란의 계절'에 현대 미술에의 관심을 잃은 것은 아주 당연했다. 이시코가 쓰게 요시하루와 만난 것은 67년이다. 쓰게 작품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시코였지만, 곧 쓰게의 작품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쓰게 요시하루나 만화주의(漫画主義) 동인들과의 교류 속에서, 이시코는 그의 '민중관'을 재차 모색하게 된다. 최근, 복간된 마지막 저서 『(자장가는 왜 슬픈걸까)子守唄はなぜ哀しいか』가 그것을 아주 잘 상징하고 있을 것이다. 이시코의 저서인『(소에마도감)小絵馬図譜』이나『(마루이시신)丸石神』를 보면,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맑스 레닌주의로부터의 이탈, 또는 새로운 관점의 출발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이시코 준죠가 쓰게 요시하루의 영향아래' 있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시코에게 있어서 현대 미술에 상징되고 있는 '말(ことば)' 이라는 것은 단순한 '지(知)에로의 신앙'이나 교의적인 '이론에로의 신앙'은, 이미 멀어져 버린 존재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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譯注 1) 도로(道路)와 행인(行人)을 지키는 신. 즉, 여행자 수호신. 자연석이나 석상 등의 형태로 표현되고, 마을의 경계나 고개 등에 세워져 있다.
譯注 2) 絵馬(え-ま). 발원(發願)할 때나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그 사례로 신사(神社)나 절에 말 대신 봉납하는 말 그림의 액자를 말한다. 나중에는 말 이외에도 그림이나 글씨를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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