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레포트 철은 아니나 제발 공부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레포트 가든 포스팅 부활. 현대사 쪽으로 요즘 듣는 수업이 20세기 양대 독재 나치즘과 스탈리니즘을 비교하는 건데 발표 참고 자료 용으로 읽고 있는 Saul Friedlaender의 "제 3제국과 유태인들"에서 87쪽부터 101 쪽까지 요약.
이글루스 가든 - 레포트를 제 때 쓰자
유태인들이야 원래 로마 제국 시대부터 유럽 땅에서 마이너 취급 받으며 박해 받는 게 일상이었지만 19세기 초 박해하던 이들도 철이 들면서 독일 땅에서는 유태인과 독일인들이 평화롭게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싹텄다. 중세 때만 해도 유태인들은 사는 구역 부터가 달랐지만 근대로 접어들면서 유태인과 비유태인 사이의 차별은 허물어져갔고 19세기 후반기 독일에서는 유태인들이 일반 시민들과 법적으로 완전히 동등한 지위를 얻었다.
중세 때의 격리는 꼭 기독교인들이 유태인들을 싫어해서만은 아니고 유태교의 계율 또한 이방인과의 접촉에 엄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태인 공동체에서도 종교성은 많이 얕아져 갔고 „훌륭한 독일 시민으로서 독일 땅에 정 붙이고 다른 비유태인 이웃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면 좋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 때만해도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여 거기로 돌아가 나라 세우고 살자는 시오니스트들은 유태인 사회에서 찌질이-_-로 통했다. 독일에서 중동이 좀 먼가.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태인들에게 독일은 조국이었고 독일어는 모국어였다. 아마 나치의 유태인 박해만 없었어도 유럽의 유태인들은 계속 유럽에서 살며 히브리 어도 다 까먹었을테니 역시 히틀러야말로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인가.
그러나 법적으로는 차별이 철폐되었다 해도 사회적, 문화적 선입견들은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리고 동등한 법적 권리를 얻은 유태인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사례가 많아지자 비유태계 독일인들의 마음 속에서는 꼴비기 싫다는 마음과 경각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래도 1차 대전 전까지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유럽의 다른 나라의 반유태주의 정서에 비해 독일의 반유태주의 정서가 결코 더 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실 정서라는 게 눈에도 안보이고 뭐라고 콕 찝어 말하기도 힘든 추상적인 것이다보니 후세인은 물론이고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한 쪽으로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나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살았던 빈 출신의 두 유태인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슈테판 츠바이크의 수기를 비교해보면 둘 다 동시대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슈니츨러에게는 반유태주의가 피부에 뚜렷이 느껴지는 자극이었던 반면 츠바이크는 분위기 파악 못하고 반유태주의는 옛날 얘기 아니냐, 사실상 사라졌다고 전혀 딴 얘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슈니츨러는 나치들이 오스트리아를 합방하기 전에 세상을 떴고 츠바이크는 영국을 거쳐 남아메리카로 망명길을 떠났으나 전쟁이 끝나기 전 망명지에서 자살했고 수십 년 후 대한민국 땅에 ‚마리 스테판 드바이트’라는 이름으로 성전환 환생해 소녀들을 위한 명작들을 써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일 내 유태인 인구는 1%에 불과했으나 주로 대도시에 몰려살고 특정 직업군에 종사했기 때문에 실제 머리 수에 비해 사람들 눈에 잘 띄었다. 유태인들이 주로 활약하던 분야는 금융, 언론, 문화, 의학, 법조계 등이었고 소수자다 보니 정치적으로는 좌파를 지향하는 경우가 잦았다.
19세기 베를린의 52 개 민간 은행중 30 군데가 유태인의 소유였고 19세기 말 은행들이 주식 회사로 변할 때 대주주들 중에서도 유태인의 비율이 높았다. 유태인 은행장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유태인들은 아직 미개한 구석이 있던 독일 경제계를 세계 시장과 연결해주는 역할을 수행했으나 사회적 차별이 있다보니 사회에 장기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가지지 못했다.
언론 또한 유태인들이 꽉 잡은 영역이어서 보수파, 기독교, 지방 신문 등을 제외한 주요 신문사는 유태인의 소유였고 유명 편집자나 기자 중에도 유태인들이 여럿 있었다. 이 대목을 읽으며 하일트는 „언론과 돈줄을 꽉 잡고 있었으면서도 진작에 독일을 정복하지 못하다니 혹시 유태인들은 바보인가 -0-„하고 생각했으나 원체 전체적 쪽수가 적은데다 정치, 군사 영역에서 힘이 없다보니 돈 좀 있고 언론 좀 장악했다 해도 사회 전체를 삼키기에는 무리였나보다.
언론 외에 출판사나 문학계 쪽에도 유태인들이 두루 활동했다. 그리고 그 쪽의 유태인 인재가 많았다는 건 기본적으로 문화 향유자 – 독자나 관객 – 들 중에도 유태인의 비율이 높았다는 얘기가 된다. 하도 이 쪽에서 유태인들이 잘나가다 보니 사람들이 비유태계 작가들조차 유태인으로 착각하고 „여긴 순 유태인들 뿐이냐!(버럭)“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유태인들이 안 한 짓도 유태인이 했다고 소문나는 경우도 있고 유태인 개개인이 그냥 열심히 살아서 성공했는데 그걸 집단화 해 „유태인 세력이 몰려온다! 음모다!“하고 오버하는 독일인들도 있었다.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반유태주의는 크게 비인종적 반유태주의와 인종적 반유태주의로 나눌 수 있으며 비인종적 반유태주의는 다시 자유주의자와 국가주의자들로 나뉜다.
비인종적 반유태주의의 논리는 „유태인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유태적 특징을 버리고 일반인이 되려고 노력하면 일반인과 유태인은 공존할 수 있다“였다. 이 중 한 똘레랑스 한다고 자부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민족, 국가간 장벽 즐! => 민족, 국가간 특수성도 즐! => 유태인들의 특수성도 즐! => 보편적 이상을 향해 전진하세 => 우린 모두 세계 시민 => 러브 앤 피스 => 해피 엔딩. 노 유태인. 노 크리스찬. 온리 세계 시민> 의 사고 과정을 밟는 반면 국가주의자들은 <우리 모두의 목표는 나라에 충성하는 훌륭한 독일 국민이 되는 것 => 유태인의 목표도 훌륭한 국민이 되는 것 => 유태인의 머리 속에서 모든 유태적 특성들을 탈탈 털어버린다 => 훌륭한 독일인이 된다 => 우리 모두 훌륭한 독일 국민. 해피 엔딩>의 사고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인종적 반유태주의자들은 애초부터 유태인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들에게 유태인은 유태인으로 태어나 유태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유태인을 붙들고 괜히 독일인 만들려고 시도해봤자 소용없으며 애초부터 유태인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것이 유일한 방도였다.
전반적으로 독일의 반유태주의는 프랑스의 반유태주의와 성격이 달랐다. 일찍부터 중앙 집권의 국가 체제를 이룬데다 혁명의 나라인 프랑스에서는 국가가 민족이나 혈통보다 우선했다. 프랑스 국민의 대다수와 다른 혈통을 지닌 이방 출신이라도 프랑스 식으로 교육받고 프랑스의 국가 이념을 받아들이면 훌륭한 프랑스 인이 될 수 있다는 게 프랑스 쪽 관념인 반면 독일은 19세기 후반까지 통일도 안된 상태로 자기들끼리 도토리 키재기 세력 싸움이나 하고 있다보니 이방인을 <독일인>으로 키워나갈 공권력이라는 게 없었다. <독일>이라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데, 혹은 존재한지 얼마 안되는데 어떻게 독일인을 정의할 것인가? 답은 이랬다. „우리 할아버지도 독일인이었고 우리 아버지도 독일인이었으니 나도 독일인이다.(우김)“ 즉 믿을 건 혈통 뿐.
프랑스에서도 유태인이 유태인으로서의 특수성을 포기하고 일반 프랑스 시민으로 거듭나도록 압력을 넣었으나 그래도 거기서는 „선 평등 후 통합“ 정책을 폈다. 즉 먼저 유태인에게 법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주면 유태인들도 알아서 프랑스 사회에 동화하려고 노력할 것이다…라고 믿어주는 것이다. 반면 독일 쪽에서는 „선 통합 후 평등“이 옳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먼저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특수성을 탁탁 털어내고 완벽한 일반 독일인으로 화하고 난 다음에야 법적인 평등이 주어질 수 있다는 시각이었다. 어찌어찌하여 1870년대에 독일 땅에서도 유태인들이 비유태계 독일인들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얻어내긴 했으나 „저놈들…먼저 제대로 독일인이 되었는지 확인한 다음에야 독일인으로서의 권리를 줬어야 하는 거 아냐?“라는 의심의 눈초리들은 남아있었다.
독일의 반유태주의가 또 독일다운 것은 다른 나라 반유태주의는 그냥 „유태인 싫다“ 정도로 남아있었던 반면 독일에서는 누가 학문과 철학의 나라 아니랄까봐 반유태주의도 조직화, 체계화의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여기 저기서 반유태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이 조직되었고 우생론과 결합하여 과학적으로 반유태주의에 근거를 대거나 철학적으로 반유태주의를 밀고나가는 움직임도 있었다. =_=
1912년 독일에서 있었던 의회 선거는 „유태인 선거“라 불린다. 실제로 이 선거에서 세력을 과시한 것은 유태인이라기보다는 좌파 세력이었지만 좌파 지향의 유태인들이 많고 실제로 좌파 정당에서 활약하는 유태인도 많다보니 좌파 세력의 승리 = 유태인의 승리 = 갓뎀, 유태인이 몰려온닷! 으로 이해되었다. 유태인들의 자금이 인터내셜널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다. 아울러 유태인들이 동등한 권리를 얻고 사회적으로 성장하던 시기가 근대화 시기와 겹치다보니 변하는 세상에 적응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근대화 = 새로운 것 = 익숙하지 않고 전복적이며 위협적인 것 = 갓뎀 유태인 으로 인식되었다. 유태인은 그냥 근대성이 아니라 근대성의 나쁜 면과 연관지어졌다. 어쩌다 비유태계 예술가가 전위 예술 한 번 해보겠답시고 아스트랄한 행동을 해도 „역시 유태인들이란 이해할 수 없는 족속“이라는 평이 따랐다.
1차 대전 직전의 반유태주의자들은 심지어 기껏 유태인들이 얻어낸 평등한 권리조차 도로 빼앗아올 것을 꿈꾸기도 했다. 개 중 진지하게 정치 팜플렛을 작성해서 황태자에게 바치는 이도 있었다. 팜플렛의 내용에 솔깃한 황태자는 부왕 빌헬름 2세를 찾아가 아빠 아빠 유태인들은 위험하니 시민권을 빼앗아보아요 하고 진언했으나 평소에는 그 자신 극우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던 빌헬름 2세는 웬일인지 얘야 얘야 그 팜플렛 쓴 놈들이 더 위험하구나 하고 쌈박하게 씹어버렸다. 훗날 나치 시대 때 황태자는 나치 친위대에 들어갔다고.
비유태계 독일인들의 유태인에 대한 경각심이 깊어진 것은 1차 대전이 터지고서였다. 원래 전쟁이면 기본적으로 민심이 흉흉해지는데다 독일이 밀리고 있다보니 독일인들은 영 시원찮은 전황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씌울 희생양이 필요해졌고 „유태인 놈들은 군대를 가도 절대 최전선으로는 안가고 안전한 데서 행정병으로 숨어있거나 군수 산업으로 전쟁을 틈타 자기들 배만 불린다더라“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울러 유태인들은 비겁한 족속이니 유태인들은 사병으로만 복무시키고 절대 장교로 승진시켜서는 안된다는 소리들도 들렸다. 실제로 군수 산업 책임자들 중 유태인 비율은 10% 정도였지만 전체 인구 중 유태인 비율이 1%도 될락말락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좀 눈에 띄긴 한다 계속 배신자 유태인들이라느니 최전선을 회피하는 유태인들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오가니 마침내 국방부에서도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1916년 11월 최전선의 유태인 병사 수를 집계하는 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분석과 결과 발표는 미뤄졌는데 덜컥 발표했다가 유태인들이 배신감 느끼고 정말 다 엎어버리겠다고 들고 일어나면 난감해지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반유태주의자인 장군에 의해 가짜 결과가 나돌았고 이는 반유태주의 세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나온 진짜 결과에 따르면 최전선에서 복무한 유태인 병사의 비율은 전체 국민들 중 유태계 국민의 비율과 큰 차이가 없었고 유태계 독일인 병사들은 비유태계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조국 독일을 위해 싸웠다.
1916년 아직 전쟁 중이었을 때 유태인 사업가 발터 라테나우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최전선에서 유태인들이 전사하면 전사할수록 이들이 전시 고리대금업을 위해 최전선에 출몰했다는 소문만 돌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