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NO3 - Whites or Non-Whites
at 2009-11-06 08:24:25 0 comment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Apartheid Museum이었다. 유명 인사나 외국의 정상들이 남아공에 오면 꼭 들린다는 바로 그 곳이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을 말하는데, 모든 사람을 백인/흑인/유색인/인도인 등으로 분류하여 인종등급별로 나누고 각 인종별로 거주지 및 출입구역 분리, 통혼금지등을 실시하는등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아주 저질적인 백인들의 장난이었다. 영화도 아닌데 이런 말도 안되는 제도가 이곳 남아공에서는 1990년대까지 이어져 왔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아프리카 대륙의 남부에는 오래전 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우리가 '부시맨'이라고 알고 있는 코이산(Khoisan)족이다. 그러다 약 2,500년 전 부터 아프리카 중부의 반투(Bantu)족이 점차 이주해 오면서 열세에 몰린 코이산족은 해변가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철기 문명을 가지고 있던 반투족은 아프리카 동부 및 남부에서 세력을 떨치며 번영하였고 여러 왕국을 건설하였는데, 현재 남아공이 있는 지역에서는 자연스럽게 두 부족이 동화되어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다. 아프리카의 남동부지역은 점차 대외 무역이 활발하게 되었으며, 당시 남아공의 특산품이던 금과 상아등을 탐낸 인도및 중국의 상인들도 이곳에 자주 들렀다고 한다.
'대항해시대'를 맞이한 유럽인들은 점차 배를 끌고 더 멀리 항해를 하여고 마침내 포르투갈인들이 유럽인으로는 처음 남아공의 희망봉에 도달하였다. 당시 포르투갈인들은 코이산족이 살고 있던 척박한 남아공 해변가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이미 무역활동이 어느정도 이루어지고 있던 남아공의 동북부인 모잠비크 지역을 탐냈다.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의 상선들도 점차 원양항해에 나서자 아시아로 가는 길목의 보급항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이곳에 지사를 설립하여 인도로 오고 가는 배들이 들러가게 하였다. 상선들은 이곳에서 신선한 음식들을 보충하였고, 선원들도 쉬어갔다. 네덜란드 본토에서는 점차 독실한 개신교를 기반으로 한 자유 이주민들이 남아공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방목생활을 하면서 유랑하는 삶의 터전을 넓혀갔다. 이것은 당연히 선주민이던 원주민과 마찰로 이어지게 되었다.
18세기 유럽에서 네덜란드의 세력이 쇠퇴하자 남아공에는 영국이 들어왔는데, 영국인들은 이곳에 '식민지 건설'을 목표로 삼아 범죄자, 노예, 자유민등을 이주시켰다. 기존 원주민이던 흑인들을 노예삼아 본격적인 영국식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이 영국인들은 이미 들어와 있던 네덜란드계 백인 보어인(Boer)과 동부지역 원주민인 코사족(Xhosa)등을 흡수하지 않고 따로 분리하여 자신들만의 국경선을 설치하여 독립적인 식민지를 건설한다. 1820년에는 5천명에 달하는 영국인들을 본토에서 대량 이주시켜 남부 해안가에 더욱 많은 식민지 도시를 건설한다. 이제 남아공의 땅에는 원래 살던 원주민 말고도 방목을 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던 네덜란드계 백인들과 도시에서 상업을 하며 정착 생활을 하는 영국계 백인들이 함께 살게된 것이다. 이들은 사용하는 언어나 문화가 모두 서로 달랐다.
18세기 소규모 부족이던 줄루(Zulu)족에서 위대한 지도자 샤카(Shaka)가 나타나 남아공 동부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국가를 세운다. 19세기 초반 남아공에는 줄루족의 강력한 팽창이 있었으나, 백인들을 몰아내지는 못했고 일부 지역에서 독립적인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이 지역들은 이후 '레소토'나 '스와질란드'로 남아공에서 분리되어 각각 다른 나라가 된다. 영국계 백인(Anglo)들과 네덜란드계 백인(Boer)들이 서로 2차례 전쟁을 치뤘는데, 결국 영국인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분리되어 있던 남아공의 많은 지역들이 남아공 연합(Union of South Africa)이라는 이름 아래 뭉쳐 영국의 해외식민지가 되었다. 1910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남아공 연합은 영국을 따라 연합군이 되어 자동 참전하게 되었는데, 1914년 보어인들이 결성한 그 유명한 국민당(National Party)이 이후 영국으로부터 남아공의 독립을 이끌어 낸다. 이 국민당(NP)이 바로 1948년 6월 4일부터 1994년 5월 9일까지 자그마치 46년간 남아공에서 장기집권을 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실시한 장본인이다. '분리'라는 뜻의 아프리칸스어(남아공에서 사용되는 네덜란드어)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남아공에서 이런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자 뒤늦게 국제사회가 들고 일어났다. 1974년 UN은 남아공의 회원국 자격을 박탈하였고, 1977년 모든 회원국과 남아공의 무기거래를 강제적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다. 남아공의 주요 경제파트너인 영국과 미국의 늑장으로 1980년대 후반에 와서야 많은 국가들이 함께 동참하여 남아공에 대한 무역제재 조치를 내렸다. 당시 남아공에 살던 한국, 대만, 일본의 외교관 및 주재원들은 '백인'으로 분류되어 별다른 차별 없이 살 수가 있었으나, 요하네스버그 주변 금광의 노동자로 이민을 온 중국인의 2세들은 남아공에서 태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인'으로 분류되어 갖은 인종적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흑인 여성들의 권리는 거의 찾아 볼 수도 없었는데, 그들은 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고, 개인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
<백인과 나머지>
<Whites Only, Europeans Only>
<No blacks became white and no whites became black>
<입구에서 본관으로 올라가는 길>
<넬슨 만델라 특별전>
<흑인 숙박 허가서>
<흑인들에게 열악하고 불리한 환경>
<교복을 입고 방문한 학생들, 백인 학생이 한명도 없다>
<화장실, 버스/택시 승강장, 열차 플랫폼, 전화까지 모두 백인용이 따로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제도를 악용한 경찰들이 실제로 많은 흑인들을 살인하였다.>
<아파르트헤이트에 항거한 흑인폭동에 실제 사용된 장갑차>
<매우 선동적인 포스터>
<창조교회 단기선교팀 목사가 왔었다고 한글로 써있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남아공 국내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는 흑인들의 집단이나 기구가 현저하게 늘어났으며, 이들이 주도하는 폭력적인 활동이 급증하면서 국가 전체가 비상사태에 빠진다. 초반에는 백인 정부를 향한 흑인들의 폭동이 주로 였지만, 점차 흑인거주지 이웃간에도 심각한 소요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대통령 보타(Pieter Willem Botha)는 세계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아파르트헤이트의 유지를 위해 더욱 노력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남아공을 국제적인 고립상태에 빠지게 하였다. 1989년 8월 보타는 즉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고, 새로운 대통령으로 드 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가 취임 하였다. 국제적인 고립상태와 함께 국내적인 비상사태를 떠맡은 그는 즉시 완전한 민주주의를 선언하며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완화하기 시작한다. 또한 지난 30년동안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던 여러 야당들을 법적으로 인정하였고, 그중 ANC(African National Congress)의 지도자로 투옥되어 있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를 아무런 조건없이 석방한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고, 사형제도를 폐지하였으며, 흑인의 보통평등비밀투표권을 보장하며 다른 법적 권리들도 백인과 동등하게 하였다.
드디어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1994년 4월 7일(현재 남아공 공휴일) 남아공에서 선거가 열렸다. ANC당의 넬슨 만델라와 국민당(NP)의 드 클레르크가 격돌하였고, 만델라가 이끄는 ANC당이 62.65%라는 놀라운 결과로 의회 총400석 중 252석을 차지하면서 집권에 성공하였다. 결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남아공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남아공 권리장전>
<지금은 없어 졌으나 SOCCER당!!>
<넬슨 만델라 특별전 외부>
<만델라와 클레르크의 공동 노펠평화상 시상식을 보며 좋아 하는 투투 대주교>
<2007년 럭비월드컵 남아공 우승, 대통령 만델라와 주장 프랑수아(Francois Pienaar)>
<만델라 일화>
<남아공 벤츠 공장의 공장원들이 직접 만들어서 만델라에게 선물했다는 자동차>
<박물관 앞쪽에 마련된 주차장>
이글루스 가든 - 여행다니기
아프리카 대륙의 남부에는 오래전 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우리가 '부시맨'이라고 알고 있는 코이산(Khoisan)족이다. 그러다 약 2,500년 전 부터 아프리카 중부의 반투(Bantu)족이 점차 이주해 오면서 열세에 몰린 코이산족은 해변가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철기 문명을 가지고 있던 반투족은 아프리카 동부 및 남부에서 세력을 떨치며 번영하였고 여러 왕국을 건설하였는데, 현재 남아공이 있는 지역에서는 자연스럽게 두 부족이 동화되어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다. 아프리카의 남동부지역은 점차 대외 무역이 활발하게 되었으며, 당시 남아공의 특산품이던 금과 상아등을 탐낸 인도및 중국의 상인들도 이곳에 자주 들렀다고 한다.
'대항해시대'를 맞이한 유럽인들은 점차 배를 끌고 더 멀리 항해를 하여고 마침내 포르투갈인들이 유럽인으로는 처음 남아공의 희망봉에 도달하였다. 당시 포르투갈인들은 코이산족이 살고 있던 척박한 남아공 해변가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이미 무역활동이 어느정도 이루어지고 있던 남아공의 동북부인 모잠비크 지역을 탐냈다.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의 상선들도 점차 원양항해에 나서자 아시아로 가는 길목의 보급항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이곳에 지사를 설립하여 인도로 오고 가는 배들이 들러가게 하였다. 상선들은 이곳에서 신선한 음식들을 보충하였고, 선원들도 쉬어갔다. 네덜란드 본토에서는 점차 독실한 개신교를 기반으로 한 자유 이주민들이 남아공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방목생활을 하면서 유랑하는 삶의 터전을 넓혀갔다. 이것은 당연히 선주민이던 원주민과 마찰로 이어지게 되었다.
18세기 유럽에서 네덜란드의 세력이 쇠퇴하자 남아공에는 영국이 들어왔는데, 영국인들은 이곳에 '식민지 건설'을 목표로 삼아 범죄자, 노예, 자유민등을 이주시켰다. 기존 원주민이던 흑인들을 노예삼아 본격적인 영국식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이 영국인들은 이미 들어와 있던 네덜란드계 백인 보어인(Boer)과 동부지역 원주민인 코사족(Xhosa)등을 흡수하지 않고 따로 분리하여 자신들만의 국경선을 설치하여 독립적인 식민지를 건설한다. 1820년에는 5천명에 달하는 영국인들을 본토에서 대량 이주시켜 남부 해안가에 더욱 많은 식민지 도시를 건설한다. 이제 남아공의 땅에는 원래 살던 원주민 말고도 방목을 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던 네덜란드계 백인들과 도시에서 상업을 하며 정착 생활을 하는 영국계 백인들이 함께 살게된 것이다. 이들은 사용하는 언어나 문화가 모두 서로 달랐다.
18세기 소규모 부족이던 줄루(Zulu)족에서 위대한 지도자 샤카(Shaka)가 나타나 남아공 동부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국가를 세운다. 19세기 초반 남아공에는 줄루족의 강력한 팽창이 있었으나, 백인들을 몰아내지는 못했고 일부 지역에서 독립적인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이 지역들은 이후 '레소토'나 '스와질란드'로 남아공에서 분리되어 각각 다른 나라가 된다. 영국계 백인(Anglo)들과 네덜란드계 백인(Boer)들이 서로 2차례 전쟁을 치뤘는데, 결국 영국인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분리되어 있던 남아공의 많은 지역들이 남아공 연합(Union of South Africa)이라는 이름 아래 뭉쳐 영국의 해외식민지가 되었다. 1910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남아공 연합은 영국을 따라 연합군이 되어 자동 참전하게 되었는데, 1914년 보어인들이 결성한 그 유명한 국민당(National Party)이 이후 영국으로부터 남아공의 독립을 이끌어 낸다. 이 국민당(NP)이 바로 1948년 6월 4일부터 1994년 5월 9일까지 자그마치 46년간 남아공에서 장기집권을 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실시한 장본인이다. '분리'라는 뜻의 아프리칸스어(남아공에서 사용되는 네덜란드어)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 서로 다른 인종간 혼인 전면 금지
- 백인이 다른 인종과 성관계를 가지면 범죄로 처벌
- 국토를 인종별 구역으로 나누어 특정 인종만 특정지역에 거주
- 16세 이상 모든 국민은 인종정보가 수록된 신분증을 지참
- 정부가 공산당이라고 지정하는 정당은 모든 활동 금지
- 서로 다른 인종간 같은 공공편의시설 이용을 금지
- 흑인아동의 취학은 정부의 통제를 따름
- 흑인은 대도시로의 이주에 정부의 통제를 따름
- 흑인들만 이주시킨 지역(홈랜드)을 따로 분리하여 독립시킴
- 인종집단별로 대학을 분리시킴
- 케이프지역 유색인종은 투표권 박탈
- 홈랜드(흑인집단거주지)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모든 권리를 박탈
남아공에서 이런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자 뒤늦게 국제사회가 들고 일어났다. 1974년 UN은 남아공의 회원국 자격을 박탈하였고, 1977년 모든 회원국과 남아공의 무기거래를 강제적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다. 남아공의 주요 경제파트너인 영국과 미국의 늑장으로 1980년대 후반에 와서야 많은 국가들이 함께 동참하여 남아공에 대한 무역제재 조치를 내렸다. 당시 남아공에 살던 한국, 대만, 일본의 외교관 및 주재원들은 '백인'으로 분류되어 별다른 차별 없이 살 수가 있었으나, 요하네스버그 주변 금광의 노동자로 이민을 온 중국인의 2세들은 남아공에서 태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인'으로 분류되어 갖은 인종적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흑인 여성들의 권리는 거의 찾아 볼 수도 없었는데, 그들은 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고, 개인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남아공 국내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는 흑인들의 집단이나 기구가 현저하게 늘어났으며, 이들이 주도하는 폭력적인 활동이 급증하면서 국가 전체가 비상사태에 빠진다. 초반에는 백인 정부를 향한 흑인들의 폭동이 주로 였지만, 점차 흑인거주지 이웃간에도 심각한 소요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대통령 보타(Pieter Willem Botha)는 세계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아파르트헤이트의 유지를 위해 더욱 노력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남아공을 국제적인 고립상태에 빠지게 하였다. 1989년 8월 보타는 즉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고, 새로운 대통령으로 드 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가 취임 하였다. 국제적인 고립상태와 함께 국내적인 비상사태를 떠맡은 그는 즉시 완전한 민주주의를 선언하며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완화하기 시작한다. 또한 지난 30년동안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던 여러 야당들을 법적으로 인정하였고, 그중 ANC(African National Congress)의 지도자로 투옥되어 있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를 아무런 조건없이 석방한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고, 사형제도를 폐지하였으며, 흑인의 보통평등비밀투표권을 보장하며 다른 법적 권리들도 백인과 동등하게 하였다.
드디어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1994년 4월 7일(현재 남아공 공휴일) 남아공에서 선거가 열렸다. ANC당의 넬슨 만델라와 국민당(NP)의 드 클레르크가 격돌하였고, 만델라가 이끄는 ANC당이 62.65%라는 놀라운 결과로 의회 총400석 중 252석을 차지하면서 집권에 성공하였다. 결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남아공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글루스 가든 - 여행다니기
할일: 밀린 여행기를 정리하자
회원님이 남기신 덧글 하나가 가든에 꽃을 피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