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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그리고 바람
at 2008-03-07 15:37:33 0 comment
한량.
과연 이 녀석을 어딘가에서 써먹을 날이 오긴 올까.......
* 원래는 모 글에 써먹으려던[...] 현대물 게임 제작시에 넣어볼까 생각하는 캐릭터.
따각따각 다소 부산스러운 타자 소리가 멈추었다. 남자는 하얀 자판 위에 손가락을 가만히 올려 둔 채 검은 글자로 가득 채워진 모니터를 잠시 노려보았다. 하아- 작은 한숨과 그는 모든 문장을 드래그하여 delete 버튼을 눌렀다. 이내 하얗게 변해버린 모니터의 빛이 눈부셨다. 그는 잠시 의자를 뒤로 밀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농땡이는 나쁜 거 아냐?"
시큰둥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잠시 멈칫하고 난 후 미소 지었다.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느슨하게 걸치고 뒤를 돌아보니 예상했던 인물이 서 있었다.
"서냐."
그의 질문에 그녀는 멋쩍게 웃는 얼굴로 "그 아이는 누구랑은 달라서 겉보기엔 몰라도 실은 성실해서 말야."라고 대꾸를 하였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의 근처로 다가왔다. 털썩- 여성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게 몸을 쇼파에 던진 채 그녀가 말했다.
"담당기자들 또 울릴 셈이야?"
"그들과의 돈독한 우정을 생각해서 인생의 고달픔에 대해서 알려줄까 싶어서."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남자에게 그녀는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거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말이네. 당신이야말로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거라고 말야." 남자는 빙긋 웃으면서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았다.
"좀 봐줘. 나도 꽤 힘들다고. 통상적으로 연재하는 곳만 네 곳이고 이 네 곳은 전부 월간지라고. 게다가 정식 발행본 분량까지 머리가 꽤나 아프다고."
"그러니까 더더욱 열심히 일해야 하는 거 아냐? 그나마 머리 돌아갈 때 팍팍 써내라고. 안 그랬다가 말년에 후회하며 펑펑 울걸. 인기 소설가일때 실컷 벌 수 있는 한 벌어두는 게 좋다 이거지."
"마치 인생은 칠팔십년은 산 할머니가 손자에게 하는 현실적 충고 같은데, 그거-"
남자는 조용히 눈을 감고 웃었다.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지는 눈에 안 봐도 훤할 정도였다. 어이없는 듯 자신을 바라보다가 곧 만사 다 귀찮다는 얼굴로 쿠션 하나를 들어올려 그걸 베고 누워있을 터였다.
"그래, 그래. 어차피 난 노땅이라 이거야."
어라- 평소와는 뭔가 다른 패턴이다. 그는 눈을 뜨고 이내 놀랐다. 귀찮다, 싫다, 좋다, 알 수 없다 이 네가지 표정을 제외하고 처음 보는 얼굴을 그녀가 하고 있었다.
삐졌다?
바람 소리가 아직은 스산했다. 겨울은 다 간 것 같은데 꽃 피는 봄은 아직 다 오진 않았다. 바람 소리에는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은 곡조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천천히 창문을 두드리고 나서 남은 여운이 찬 기운이 되어 떠돌았다. 남자는 모처럼 진지하게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그녀와 안지는 어연 3년. 정확히는 3년하고도 7개월. 자신이나 그녀의 짧고도 좁은 인간관계를 생각하면 꽤 긴 교우였다. 그리고 동시에 이만큼이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이라는 건 앞으로도 계속 끈질긴 인연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그런 시간 속에서 그녀가 그에게 보여준 얼굴 표정은 단 네가지였다.
진짜 하기 귀찮아.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당연히 좋은 거지.
..............................
그리고 지금 막 그녀는 새로운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 참 미안하게 됐군요. 간단히 말하면 삐졌다라는 표정.
"이거... 이거 참."
어지간해서는 절대 실수 하는 일이 없는 남자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리고 이 상황을 인식하자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라니. 3년하고도 7개월만에 인간관계에서 느낀 신선한 기쁨이었다.
"왜."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그녀가 짜증을 부렸다. 그는 조용히 웃으면서 머리를 굴려보았다. 어디보자. 그녀가 묘한 데서 어린아이같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방금 한 소리에 연연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즉 자신과 만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무슨 일이야."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그러나 눈만은 날카로운 기색을 내비치며 량이 물어왔다. 그녀는 그의 말에 잠시 입술을 일자로 꾸욱 다문 채 팔짱을 끼고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있었다. 시간이 꽤 흘러서 웬지 출출해진 그가 부엌에서 먹을 것이라도 찾아볼까 생각할때 즈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라고 잠시 입을 열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내 한숨과 함께 물었다.
"내가 그렇게 노인네 같아?"
이런......신이시여. 웃음을 주는 방법도 정말 가지가지십니다. 량은 처음에는 다소 어이가 없었고 이내 실 없는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으며 마지막엔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꼬맹이냐?"
그녀의 짜증과 그의 폭소가 진정된 후 그들은 한 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머그컵을 쥐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그가 한 질문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량은 미소 지으며 "원래 연하 다루기가 힘든 거 아니겠어? 고작해야 4살 차이지만 말이지." 라고 제법 연장자다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게 아니야."
사뭇 심각한 목소리였다.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일지도 몰랐다. 량은 최악의 경우 비를 자신의 방에서 재우고 그녀를 비의 방에서 재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머그컵의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려보았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냐. 난 그 아이에게 연애감정이란 걸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 그는 아무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차분한 눈빛과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 당신 말처럼 사랑한다 쳐도 난 그걸 몰라. 사랑이 뭔지 몰라서 그 얠 사랑하는지 안하는지도 몰라. 그 얠 보면 물론 좋아, 즐거워. 하지만 그건 하다 못해 친구네 고양이를 봐도 똑같은 레벨이야. 마음에 드는 인형을 봤을 때라던지......"
그러니까 나로 하면 좋을텐데.
"뭐라고?"
량의 중얼거림에 그녀가 귀를 세웠다. 량은 조심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단순한 맞장구. 그래서 결론은?"이라고 물었다. 잠시 량을 물끄러미 보던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짧게 대답했다.
"됐어."
"응?"
"이제 됐어."
화가 난 것일까 아님 귀찮아진 것일까. 아무래도 후자쪽에 가까운 것 같았다. 이래서 안심할 수 있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사랑마저 귀찮아하고 있었다. 지독한 변덕쟁이라서, 게으름뱅이라서 다행이었다. 사랑을 아예 하지 않으려 드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넌 지금이 제일 좋아. 지금 이대로."
모처럼 현관문 앞 까지 그녀를 배웅나갔다. 그녀는 "물론 그렇겠지."라고 다소 뚱하니 대답한 뒤 문을 열기 위해 뒤돌아섰다.
"잠깐."
량이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곧 뒤를 돌아보았다. 량은 아주 짧게 그러나 아주 길게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뺨에 스쳤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피부가 기분이 좋아 살짝 물어보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어 보이는 것이라도 자신의 것이 아니면 손댈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런 짓을 하면 더 이상 돌이킬 수는 없었다. 오지 않는 기회를 탓하며 모든 걸 한 순간의 호기심으로 망가트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량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미처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손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또 와-"라는 한 마디와.
겨울이 다 간 거리엔 아직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이름 모른 녹색 풀도 군데 군데 보이고 제법 산뜻한 맵시를 낸 사람들의 소리가 분주했다.
겨울 그리고 바람.
찬찬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의 모든 걸 얼릴 것 같던 추위와 괴로움이.
이글루스 가든 - 소설을 쓰자. 대작가가 되자!



